2010년 7월 3일 토요일

양코프스키의 일생



볼셰비키를 피해 원산으로 피난한 난민들 대부분은 곧 한반도를 떠났다. 그러나 일부는 한반도에 남아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이중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바로 유리 양코프스키 가족일 것이다. 유리 양코프스키의 부친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원래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1863년 1월봉기에 참여한 죄로 시베리아로 유배된 인물이다. 고된 강제노동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된 미하일은 블라디보스토크 남쪽에 위치한 시데미반도에 정착해 농장을 조성하며 거대한 부를 이뤘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는 한인들이 급속도로 이주하고 있었다.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연해주 지역 한인들을 농장의 노동자로 고용하고 이들을 악명 높은 마적 홍호자로부터 보호하면서, 한인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뛰어난 사격술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네눈이’로 알려진 미하일은 점차 호랑이 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일생을 통해 모두 9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미하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들도 호랑이 사냥으로 연해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명성을 얻었다. 1912년 미하일이 죽은 후 양코프스키농장은 장남 유리 가족이 돌보며 번성했다.
1922년 늦가을 ‘네눈이의 아들’ 유리 양코프스키와 그의 가족 일행은 다른 백계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를 피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청진에 도착할 당시 이들이 가진 전 재산은 조그만 토지와 두 채의 오두막집 그리고 마구간으로 사용하는 공터뿐이었다. 이들의 피난생활은 고달프고 험난하기만 했다.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러시아 피자의 일종인 피로키(?), 철물, 등유 등을 마차에 싣고 청진 시내를 돌며 팔았다. 그리고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한 정어리를 구입해 하얼빈으로 보내거나, 건설현장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나비를 잡아 표본을 만들어 외국의 수집가들에게 팔기도 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경마장에서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돈을 받고 전문기수로 일하기도 했다.
유리 양코프스키 가족의 피난생활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크게 변했다. 1925년 여름 양코프스키 가족은 시데미에서 가져온 8마리의 젖소 가운데 단지 한 마리만이 남아 있을 정도로 재산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양코프스키는 청진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역 부근 온포지역에 한 일본인 온천장 주인에게 아끼던 자동차마저 팔아야만 했다. 감사의 표시로 온천장의 일본인 주인이 양코프스키 가족을 자신의 휴양소로 초대했다. 이날 밤 일행은 등나무 넝쿨로 감겨 있는 작지만 “낙원 같은” 오두막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에 반한 양코프스키는 인근에 있는 한 한국인이 소유한 집을 여름동안 임대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후에 가까운 친척이자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아버지인 보리스 브리너로부터 돈을 빌려 가옥과 대지를 구입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점차 주변 농경지, 과수원, 삼림의 주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대표적 러시아촌인 노비나가 탄생하게 되었다. 원래 노비나는 원래 양코프스키 가문의 문장에 그려진 단검을 의미하는데, 이제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 만주, 중국, 유럽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휴양지가 되었다. 1928년 여름부터 상하이와 하얼빈의 부유한 백계러시아인들이 양코프스키로부터 가구당 300평으로 조성된 주변 대지들을 구입해 별장을 신축하면서, 노비나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유리 양코프스키는 노비나에서 남쪽으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함경북도 경성군 염분리 용현리 섬골산 기슭에 새로운 별장지대를 조성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푸시킨이 지은 시를 인용해 루코모리예로 불렀다. 해안가에 위치한 루코모리예는 노비나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6킬로미터에 이르는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황금모래가 해안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모래사장 바로 옆에는 아름다운 해송이 병풍처럼 펼쳐있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반한 부유한 백계러시아인들이 유리로부터 대지를 구입해 이 지역에도 별장을 지었다. 이들 가운데는 보리스 브리너도 있었다.
나라를 잃은 백계러시아인들에게 루코모리예는 지상낙원과 같았다. 루코모리예의 여름철 바닷물은 따스하고 파도도 적어 수영하기에 적합했다. 휴양객들은 아침에는 주로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가 되면 주변 지역을 관광했다. 루코모리예 해안가 남쪽 낮은 언덕 기슭에는 전형적인 어촌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어부들이 잡은 정어리를 모래사장에 펼쳐 말리곤 했다. 백계러시아인들은 뱃사장에 누워 바닷바람이 뿌리는 매캐한 냄새에 취하곤 했다. 간혹 주변 어촌에서 아름다운 한국 여인들이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져오는 새우나 게 등을 사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수영 후 이들이 주변 마을을 지나가노라면 어린 아이들이 집에서 뛰쳐나와 “야오시키, 야오시키”하며 외쳐 되었다. 한국아이들에게 서양인들은 모두 양코프스키처럼 보인 것이다.
하얼빈과 상하이에 거주하는 백계러시아인들은 물론 일본인들도 노비나를 방문했다. 이들 중에는 시인, 작가 그리고 언론인들은 물론 고위 관료와 군 장성도 있었고 특히 소기 조선총독도 있었다. 그러나 양코프스키 일가가 누구보다도 우정을 느끼고 인간적인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이 접촉한 한국인들은 도시의 관료나 사업가와 같은 세련되고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의 보통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냥꾼들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사냥을 나가면 한국인들과 함께 김치를 먹고 초가집에서 잠을 자며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함경산맥의 깊고 험준한 산 속에서 숙련된 한국인 사냥꾼들은 양코프스키 가족에게 친 형제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유리의 장남 발레리 양코프스키는 이들을 아르세니에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한국의 데르수 우잘라로 부르기도 했다.
발레리는 매년 성수기에는 50명 내지 60명에 이르는 여행객들이 노비나에서 그리고 이보다 약간 적은 수의 서양인들이 루코모리예에서 여름을 보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곳으로 휴양 온 러시아인들은 사냥이나 등산은 물론 배구나 고로드키(?), 연극이나 시낭송 등 다양한 여가활동을 즐겼다. 특히 노비나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모봉이 있는데, 여행객들은 관모봉에서 벌목한 목재들을 운반하는데 사용되는 협궤철도를 이용해 등산 혹은 사냥여행을 떠나곤 했다. 이외에도 배구는 이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노비나와 루코모리예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각각 팀이 구성되었고, 보통 일요일 미사를 마친 후 경기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매년 시즌 마지막에 노비나컵을 놓고 경쟁하곤 했다. 이외에도 휴양객들은 아마추어 배우가 되어 연극을 무대에 올리곤 했다. 보리스 브리너의 두 번째 부인인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유명한 배우로 노비나에 살면서 아마추어 연극을 연출하고 제작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노비나에 살고 있는 백계러시아인들이 모두 참여한 또 다른 활동 중의 하나는 종교의식이었다. 미사는 매주 러시아정교회 식으로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미사가 끝나고 종교행렬이 시작되면 양코프스키 가족들과 친구들은 교회 벽에 치장된 깃발과 성상들을 떼어내 간단한 예식을 치룬 후 걸어서 인근 온포천까지 내려가 흐르는 강물을 축복했다. 이들의 종교의식은 볼셰비키의 폭정에 대항해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으려는 일종의 독립선언과 같았다. 백계러시아인들은 미사를 통해 볼셰비키에 대한 적대감과 구국의 꿈을 고취시키며 동지애와 가족애를 다지곤 했다.
유리 양코스프키 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비나의 앞날에 서서히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38년 8월 중순경 주을 주변에 엄청난 폭우가 내리면서 온포천이 범람하고 다리는 물론 상당수 집들이 파손되었다. 양코프스키 일가도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지만 곧 재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암울해져가는 국제정세였다. 일본은 북쪽의 만주와 남쪽의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고 있었다. 1938년 중엽 한국, 만주, 그리고 러시아의 국경선이 맞닿는 지역에서 하산호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노비나 주변 지역에 등화관제가 실시되었고, 양코프스키 가족을 비롯해 상당수 백계러시아인들이 소련의 간첩으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휴양차 노비나를 방문한 러시아인들의 수도 점차 줄면서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1년 일본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비나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간혹 각종의 여행 규제를 극복하고 노비나를 방문하는 휴양객들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전쟁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당시 유리 양코프스키 가족은 사슴농장과 사냥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휴양객들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많았기 때문에, 다행히도 재정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쟁의 종식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끝내고 한반도에 해방을 가져왔다. 그러나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백계러시아인들에게 종전은 가족의 해체와 긴 고통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했다. 볼셰비키를 피해 한반도로 피신한 양코프스키 일가에게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고, 이들은 애써 일군 재산을 다시 잃게 되었다. 1946년 9월 소련군이 노비나에 들어와 남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면서, 30여년의 노비나 역사는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46년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유배된 유리는 1956년 병과 가난으로 고통 속에 죽었다. 그의 다섯 자녀들의 운명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남한과 미국 등 자유세계로 탈출한 빅토리아나 아르세니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세계에 남아 있던 ‘네눈이 손자’ 발레리는 차디 찬 주오트카의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발레리는 짜르의 전제정치,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공산정권 등 20세기의 다양한 정치체제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었다. 2010년 발레리는 9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발레리는 한반도에서 지낸 기간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