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12일 일요일

미하일 양코프스키의 기록을 통해서 본 러시아의 연해주 개척

이 글은 폴란드 출신 정치범으로 연해주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미하일 양코프스키(Mikhail Jankowski 또는 Mikhail Ivanovich Yankovsky, 1842-1912)의 개인사를 추적한 기록이다.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정치범으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지만 자유민이 된 후 연해주에 정착해 러시아 변경지역 개척자로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연해주에 정착하면서 구한말 이 지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과 광범위한 교류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가 적군의 손에 들어가자 함경북도 청진으로 피신해 인근 주을에서 백계러시아촌을 형성해 살면서 식민지 시대 한반도에 거주한 러시아인들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국내는 물론 영어권에서 미하일 양코프스키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상황이다. 본고는 미하일 양코프스키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연해주가 러시아의 변경으로 확립되는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양코프스키 가문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양코프스키 가문의 선조들은 이교도들에게 약탈당한 성궤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전쟁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또한 가문의 선조중의 한 사람인 타데우쉬 양코프스키(Tadeush Novina Yankovsky)는 14세기경 폴란드 영토를 침략한 튜튼기사단에 대항해 전투에 참가해 폴란드 왕의 목숨을 구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러나 타데우쉬는 이 전투에서 다리를 잃게 되었고, 왕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기사의 작위와 청색 배경에 방패와 단검이 새겨진 가문의 문장을 하사했다. 폴란드어로 노비나로 불리는 이 단검은 이후 수 백년 동안 양코프스키 가문의 중요한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1922년 미하일 양코프스키의 후손들이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함경북도 주을에 정착하면서 이곳에 세운 휴양지를 노비나라고 칭하기도 했다.얀 양코프스키(Yan Yankovsky)의 아들로 태어난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폴란드 북동부 지역 티코친(Tykocin) 인근에 위치한 가문의 장원에서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보냈다. 러시아 서부변경에 위치한 폴란드 출신인 그가 연해주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러시아와 폴란드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대 폴란드의 역사는 망국의 한이 사무친 비극의 연속이었다. 18세기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절대군주제를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팽창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들 나라에 둘러싸인 폴란드는 약체 귀족공화국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영토를 유린당하고 있었다. 1772년과 1793년 이들 주변 강대국에 의한 1, 2차 분할에 이어, 1795년 제3차 분할을 계기로 폴란드는 유럽의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나라를 잃어버린 10여 만명의 폴란드인들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도와 러시아를 공격하는데 참여했지만 이들의 노력도 실패하고 말았다. 1815년 유럽의 국경을 결정하기 위해 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도 폴란드의 해체는 재확인되었고, 명목만 남아 있는 바르샤바공국은 러시아와 결합된 폴란드왕국으로 개편되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사회를 관통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폴란드인들도 러시아에 대항해 수시로 크고 작은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독립운동은 짜르의 강력한 전제정치와 주변국들의 무관심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폴란드 민족의 독립운동은 1856년 러시아가 크리미아전쟁에서 패하면서 다시 살아났다.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약화되었고 사회적으로도 불안이 고조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1855-81)는 유럽의 강대국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개혁을 통해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탈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깨달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하고 폴란드에 대해 보다 온건한 정책을 추진했다. 나아가 폴란드에 대한 계엄령을 철회하고 정치범들을 사면하고 언론에 대한 검열도 완화했다. 1862년에는 폴란드 귀족과 엘리트 계층을 포용하기 위해 온건한 비엘로폴스키 후작(Aleksander Ignacy Wielopolski, 1803-1877)을 새로운 폴란드 행정 책임자로 임명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자치와 독립을 위한 폴란드인들의 요구는 커져만 갔다.
1861년 말부터 시작된 일련의 폭동은 농민과 학생들에 의한 조직적인 무장봉기로 발전했다. 1861년 빌니우스(Vilnius)에서만 116번의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폴란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러시아군이 소집되었고, 1863년 1월 23일 밤 비엘로폴스키는 폴란드 청년들을 러시아군에 징집하기 위한 긴급명령을 발표해 시위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실패하고 오히려 폴란드인들이 대규모로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1863년 1월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지역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전제정치에 항거해 발생한 폴란드인들의 독립운동은 흔히 1월봉기(1863-1864)로 알려져 있다. 1월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노동자, 서기, 하위 성직자, 농민 및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전문적인 군사훈련도 받지 못했고 지도자도 없었으며 무기도 부족했다. 봉기군의 사령관으로 내정된 미에로스와프스키(Ludwik Mierosławski, 1814–1878)는 프로이센지역에서 폴란드로 이동 중 러시아군에 의해 진로가 차단되어 봉기군을 지휘할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했다. 때문에 다음 1년 반 동안 계속된 1월봉기에 폴란드인들이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지만, 대부분 산발적인 소규모 게릴라전 형식으로 진행되어 러시아군에 의해서 쉽게 진압되었다.
폴란드 귀족가문 출신인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1월봉기가 발생할 당시 모길료프(Mogilyov) 지역의 고레츠 농업대학(Gorets Agricultural Institute)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또래의 폴란드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미하일도 러시아 지배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863년 1월봉기가 발생하자 미하일은 동료들과 함께 모길료프 지역에서 급히 조직된 한 학생독립운동단체에 가담했다. 이 단체는 루드윅 즈베즈도프스키(Ludvig Zvezhdovski)에 의해 곧 소규모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도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루드윅은 전에 모길료프 주지사의 보좌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인물로 당시 총참모부에서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1월봉기에 참여한 폴란드 혁명세력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무기이었다. 미하일이 속해 있는 소규모 군사조직은 중앙민족위원회(Centralny Komitet Narodowy, Central National Committee)의 지시에 따라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던 금을 탈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폴란드 혁명세력은 이 금을 탈취해서 영국에서 루시타니아의 한 항구로 전달될 예정인 무기류의 구입대금으로 지급하려고 했다. 미하일 양코프스키가 소속된 분견대는 러시아의 수송마차를 급습해 황금으로 가득 찬 상자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뿐 이들은 뒤쫓아 온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루드윅과 미하일을 비롯한 혁명세력은 모두 체포되었고, 러시아군은 금괴를 다시 회수했다. 한편 금괴탈취사건의 주모자인 루드윅 즈베즈도프스키는 체포 즉시 탈출에 성공했으나 곧 다시 잡혀 처형되었다. 미하일을 비롯해 금괴탈취사건에 참여한 혁명세력들은 보브루이스키(Bobruisk) 감옥소에 투옥되어 반란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1863년 5월 22일 모길료프에서 열린 군사법정에서 미하일은 무장봉기를 선동하고 체포 당시 무기를 은닉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미하일에 대한 심문은 1863년 여름까지 진행되었다. 1863년 9월 미하일에 대한 최종 선고가 결정되었다. 크라이지역의 총독인 미하일 무라비요프(Mikhail Nikolayevich Muravyov-Vilensky, 1796-1866)는 양코프스키 어머니의 강력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양코프스키의 귀족 지위를 박탈하고 전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8년동안 강제노동을 하도록 중형을 선고했다.
1월봉기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분수령이 되었다. 봉기의 실패로 수많은 폴란드인들이 처형되었고 이들이 거주하던 마을은 러시아군의 약탈로 폐허로 변했다. 특히 1월봉기 당시 빌니우스 지역 치안책임자인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사형집행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128명의 사형을 집행했고 9423명의 폴란드인들을 러시아 서쪽 변경인 동토의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미하일 양코프스키도 정든 고향을 등지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지의 동토로 떠나야만 했다. 미하일 일행은 러시아 중부 스몰렌스크(Smolensk)를 출발해 무려 18개월이나 걸어서 동부 시베리아의 트랜스바이칼 지역에 도착했다. 시베리아로의 여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도중에 많은 정치범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당시 시베리아에는 이미 짜르의 전제정치에 항거해 1825년 봉기에 가담한 죄로 유배 온 12월당원들이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죄수들은 광산에서 잡역부로 일하거나 아무르강에서 목재를 운반하는데 사용되는 바지선을 제작하는 등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바이칼 호수 부근 광산에서 잡역부로 일하며 고통스러운 중노동을 견뎌야만 했다. 다행히도 1868년 알렉산드르 2세가 사면을 발표해 미하일을 비롯한 1월봉기에 참여한 일부 죄수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부 시베리아에서 자유롭게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를 얻은 미하일은 광산 잡역부로 일한 경험을 살려 레나강 지류인 오랙마에 위치한 금광에서 일자리를 얻어 정착했다. 러시아의 동쪽 끝에서 태어난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이제 죄수에서 자유인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러시아의 서쪽 끝 변경지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하일의 연해주 정착은 러시아의 극동지역 팽창과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19세기 후반 이후 짜르 정부는 시베리아 변경지역을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개발에 핵심에 놓여 있는 인물은 바로 니콜라이 무라비요프(Nikolay Nikolayevich Muravyov-Amursky, 1809-1881)이었다. 1847년 동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 무라비요프는 시베리아 특히 아무르 지역에 대한 러시아 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 지역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추진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무라비요프는 동시베리아의 총독부가 있는 이르쿠츠크(Irkutsk)에 러시아지리학회 동시베리아지부를 설치하고 나아가 행정적 재정적으로 적극 후원했다. 사실상 동시베리아지부는 설립 초기부터 동시베리아 행정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당시 시베리아에는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행정관리나 지식인들이 부족했다. 따라서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정치범들이야말로 지리학회의 탐사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인재풀 중의 하나였다. 정치범으로 시베리아에 유배 온 인물가운데 과학적 지식이 있는 상당수 사람들이 러시아지리학회의 동시베리아 지부에 고용되어 탐사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1863년의 1월봉기 이후 시베리아로 추방된 일부 폴란드 출신 지식인들은 유형생활을 통해 자연환경 분야에서 전문적인 수준의 지식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현장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전문가로 거듭난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현실적으로 부자유스러운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험난하고 외진 곳에서 살 의사도 있었다. 이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지리학회 동시베리아지부가 제공하는 저렴한 임금도 이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리고 혼잡하고 법과 질서가 유지되고 있던 유럽보다 시베리아에서 이들은 보다 자유롭고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짜르제국의 전제정치에 항거해 반란과 봉기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들이 바로 이제 시베리아에서는 러시아 제국을 건설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예를 들면 폴란드의 한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한 알렉산드르 체카노프스키(Aleksander Czekanowski, 1833-1876)는 1월봉기에 가담한 죄로 1865년 시베리아의 동남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강제노동을 선고 받았다.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지역의 식물과 광물을 채집했다. 후에 이러한 공로로 이르쿠츠크로 보내져 러시아지리학회 동시베리아지부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1870년대 러시아지리학회 동시베리아지부를 위해 탐사활동에 종사한 사람 중에는 베네딕트 드보프스키(Benedykt Tadeusz Dybowski, 1833-1930) 등이 있다. 강제노동에서 해방된 미하일 양코프스키도 러시아에 대한 민족적 분노를 극복하고 이제 주어진 환경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베네딕트 드보프스키는 미하일이 연해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이들은 같은 폴란드계 러시아인으로 유사한 인생경로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스크(Minsk) 출신으로 동물학을 전공한 드보프스키는 바르샤바의 한 대학에서 동물학 교수로 근무했었다. 열렬한 폴란드 독립운동가로 1861년 빌니우스에서 발생한 시위에 참여하기도 한 그는 1월봉기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동료학자들의 탄원과 독일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압력을 통해 12년간 시베리아의 유배로 감형되었다. 1864년 8월 10일 드보프스키는 상트 페테스부르크를 출발해 모스크바와 노브고르드를 거쳐 1864년 12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드보프스키는 치타(Chita) 부근에 배정되어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기회가 있는데로 주변지역의 동식물을 연구하고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코르사코프(Mikhail Semyonovich Korsakov: 1826-1871)총독은 동시베리아 지역의 풍부한 자연자원과 생태계를 연구할 수 있도록 1866년 드보프스키를 강제노역에서 풀어주고 시민권을 복권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슨(Darsoon) 온천지역의 한 병원에서 환자를 치유하며 근무하도록 제안했다. 드보프스키는 이 주변 지역에서 조류, 어류, 포유류 등을 연구할 수 있었다. 1868년 가을 드보프스키는 이르쿠츠크로 그리고 후에 바이칼호수 남서쪽에 위치한 쿨툭(Kultuk)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러시아지리학회의 지원으로 바이칼호수의 생태계를 연구했다. 1869년에는 아무르 하구지역에서 스콜코프(Skolkov) 장군이 주도하는 한 위원회에 프르제발스키(Nikolai Mikhailovich Przewal'skyy, 1839-1888)와 함께 참여했다. 이 위원회는 우수리지역의 식물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황비를 위한 식물원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식물을 수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에서 드보프스키는 주로 어류군을 조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 탐사에 참여한 프르제발스키는 1867년부터 지신허, 얀치헤, 시미지 등 한인정착지역과 한반도 북부의 경흥 등을 방문하고 1870년 페테스부르크에서 『우수리지방 여행, 1867-1869』를 출간하기도 했다.
1872년 어느 날 베네딕트 드보프스키는 미하일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당시 드보프스키는 러시아지리학회로부터 아무르강 분지에서 북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생태 환경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받은 상황이었다. 드보프스키는 이 조사에 미하일이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농업대학에 다녔던 미하일은 평소에 동식물을 수집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 자연환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하일은 금광 일을 포기하고 드보프스키의 탐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미하일은 얼마 안 되는 살림도구와 총 그리고 유일한 친구인 애완견 ‘바’와 함께 드보프스키를 만나기 위해 치타로 갔다. 치타에는 빅토르 고들레프스키(Victor Godlewski, 1840-1880)라고 불리는 또 다른 정치범이 탐사에 참여하기 위해 미하일을 기다리고 있었다.드보프스키는 양코프스키, 고들레프스키 등과 함께 우수리 지역 남부일대 조사에 착수했다. 드보프스키 일행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아무르강을 따라 여행하기에 적합하고 급한 물살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선박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세 명의 탐사대원들은 치타를 출발해 미하일이 유배 시절 바지선을 만들곤 했던 잉고다강 유역에 위치한 시바코보(Sivakovo)라고 불리는 코사크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노와 돛이 장착된 작은 목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배를 “희망호”라고 명명했다. 탐사대원들은 이후 2년여 동안 희망호를 타고 잉고다, 시르카, 아르곤 그리고 아무르강을 차례로 탐사하며 많은 동식물들의 표본을 채집했다. 탐사 이 년째 되는 해 겨울 미하일 일행은 우수리강 어귀로 들어가 선박을 카자케비체보(Kazakevichevo)라고 불리는 인근 코사크 마을에 정박시켰다. 그리고 수집한 물고기, 새, 조류, 곤충, 포유동물의 두개골, 모피, 그리고 광산에서 캐낸 광석의 견본을 동부시베리아의 수도인 이르쿠츠크로 보내고 탐사를 마쳤다. 연해주 지역의 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일행들은 숭가차강(Sungacha River)과 한카호(Khanka Lake)를 건너 1874년 8월 당시 군사요새지로 새롭게 조성되기 시작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탐사활동이 종료된 후 미하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직업이 필요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에는 광산이 한창 개발되고 있었지만 능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러시아 출신 광부들을 확보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다년간 광부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미하일은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카타케비체보에서 체류하는 동안 쿠스터(Kuster)라고 불리는 광산주가 소유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아스콜드섬(Askold)의 한 금광의 지배인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 이후 1874년부터 1879년까지 약 5년간 미하일은 아스콜드섬에 있는 광산에서 지배인으로 일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천혜의 자연환경은 미하일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미하일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지역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미 미하일은 아무르 지역의 탐사를 통해 그리고 아스콜드섬의 금광 지배인으로 연해주 지역 자연환경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가끔 북태평양 연안을 따라 한반도 동해안까지 배를 타고 내려와서 말을 타고 올라오곤 했다. 1877년 미하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0 마일 떨어진 아무르만 서안에 위치한 작지만 아름다운 반도를 발견했다. 원주민들이 시데미(Sidemy)반도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문명의 이기가 아직 소개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으로 원주민과 한인 그리고 중국인들이 혼재해 살고 있었다. 시데미반도는 농장을 경영하는데 적합한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에는 바닷가로부터 바람이 항상 불어오기 때문에 우수리 지역의 가축사육업자들이 두려워하는 모기와 날파리들도 거의 살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깨끗한 샘물과 최상급의 목초지도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모래사장도 있고 주변에는 물고기와 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평소 말의 사육에 관심이 많았던 미하일은 이 지역의 기후와 토양이 말을 사육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이 지역에 정착해 살길 원했다. 당시 시데미반도는 국유지로 관리되고 있었다. 미하일은 곧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군총독 에드만(Gustav F. Erdman, 1818-1883)을 만나 이 지역을 장기간 임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시베리아 정부는 광활한 미개간지를 개발할 수 있는 충분한 예산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에드만은 미하일을 열정적인 사람으로 생각했다. 미하일이 자신의 재산과 노력으로 이곳에 뛰어난 종마 사육장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에드만은 미하일에게 반도 전체를 장기간 임대해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개발이 가속되고 아스콜드섬의 광산업이 번창하면서 러시아인들은 물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연해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하일도 오랜 방랑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아스콜드섬에 정착하면서 이들 새롭게 정착한 친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이들 가운데는 극동지역 북태평양 연안에서 전설적인 탐험가로 잘 알려진 겍(Fridolf Kirillovich Gek, 1836-1904)이라 불리는 항해사가 있었다. 겍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갑, 만, 곶 등 여러 곳이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기도 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스콜드섬까지의 각종 선박운송을 담당하면서 미하일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에드만으로부터 임대허가를 받은 뒤, 미하일은 겍을 만나 시데미반도를 설명하며 이곳에 함께 정착해 살자고 제안했다. 북태평양 연안을 수시로 탐사해 경험이 풍부한 겍 역시 이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캑은 양코프스키의 제안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곧 반도로 이주했다. 겍 선장은 해안가에 집을 짓고 거주했는데 이후부터 이 지역은 겍의 이름을 따라 겍만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한편 미하일은 시데미반도의 한 계곡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낮은 산등성이로 인해 폭풍우로부터 가축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장차 종마목장터로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계곡지역에는 커다란 호수를 채울 수 있는 작은 강도 있어 가축들을 사육하기에도 편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곳으로 즉시 이주할 수 없었다. 미하일이 아스콜드 광산의 소유주 쿠스터와 맺은 고용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쿠스터가 그의 이주를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결혼 적령기가 지난 미하일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일생을 함께 할 반려자였다. 미하일의 손자 발레리에 의하면, 미하일은 시데미반도에 정착해서 집을 짓고 농장을 경영하기로 결심하면서 결혼을 서둘러서 하려고 했다.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생사를 같이할 가족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동안 미하일은 아스콜드섬에서 사망한 한 퇴역군인의 아내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성과의 사이에 아들 알렉산드르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여성이 갑자기 죽게 되자 미하일은 무엇보다도 아들을 돌보며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고 그나마 다른 지역에 비해서 처녀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미하일은 결혼 상대자를 찾는데 지역의 사진사인 칼 이반 슐츠(Karl Ivanovich Shultz)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칼은 인근에 살고 있는 15명의 처녀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 처녀 개개인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 가운데 미하일은 다른 어떤 처녀보다 올가(Olga Lukinichna)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올가는 시베리아의 원주민인 블리아트 출신이었다. 어려서 고아가 된 올가는 삼촌이자 블라디보스토크항의 부항만장이던 오십 이바노비치 쿠르투코프(Osip Ivanovich Kurtukov)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있었다. 올가는 말이 친척이었지 하인과 같은 삶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오십의 집에는 올가의 숙모와 할머니 그리고 두 명의 조카 등 네 명의 여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올가만이 새벽 5시에 일어나 강가로 가서 빨래하고 돌아와서는 음식을 만들고 청소하는 등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미하일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올가와 같이 검소하고 근면한 사람이었다. 다음 날 아침 미하일이 오십을 만나 자신을 소개하자, 오십은 미하일이 자신의 딸에게 관심이 있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올가를 본 미하일은 한눈에 그녀에게 반했다. 올가는 검소한 옷을 입고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만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올가의 환한 웃음, 정열적인 힘 그리고 부지런한 본성 심지어 걸어 다니는 스타일도 좋아보였다. 아스콜드섬으로 돌아 온 미하일은 한 달 가량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올가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올가는 며칠간 망설였지만 결국 미하일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한편 미하일이 오십의 딸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올가의 가족들은 미하일의 결정에 모두 놀랬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의 뜻을 꺽을 수는 없었다. 올가의 할머니로부터 결혼 승락을 받은 미하일은 1877년 5월 2일 결혼식을 검소하게 치룬 뒤 작은 포경선을 타고 함께 아스콜드섬으로 돌아 왔다.
미하일과 올가는 아스콜드섬에서 신혼의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878년 이들 부부는 미하일의 혼전 아들인 알렉산더(Alexander: 1876-1944)를 입양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이들 부부 사이에 첫딸이 태어나 엘리자베스(Elizabeth: 1878-1915, approx)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1879년 4월에는 아들 유리(Yuri: 1879-1956)가 태어났다. 정치범으로 홀로 시베리아에 유배 온 미하일에게 가족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하루빨리 쿠스터와의 고용계약을 종료하고 시데미반도에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를 꿈꾸고 있었다. 더구나 이미 시데미에 정착한 겍은 수시로 아스콜드섬을 방문해 미하일과 올가에게 시데미반도에서의 생활을 흥미롭게 알려주었다. 그는 이 부부에게 만 주위에서 서식하고 있는 풍부한 야생조류와 짐승들 그리고 어류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만으로 들어오는 청어 무리, 강 입구를 산란장소로 삼아 회귀하는 엄청난 연어무리, 그리고 반도와 본토를 가르는 늪지대에는 오리, 거위, 백조들이 살고 있으며, 주변의 언덕은 뀡과 야생사슴의 천국이었다. 양코프스키 가족은 하루 속히 이곳으로 이주해 살기를 원했다.
1879년 6월 미하일은 마침내 광산 지배인으로서의 직업에 마침표를 찍고 아스콜드섬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겍 선장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동안 시데미반도에서 쓸쓸히 지내던 겍 가족들에게 이제 새로운 이웃이 생긴 것이다. 겍 선장은 직접 미하일 가족들을 자신의 스쿠너 “아나”에 태워 시데미반도로 데리고 왔다. 미하일 가족 이외에도 처남들, 그리고 그동안 미하일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한 한인들과 퇴역 러시아 군인들도 미하일을 따라 반도로 들어 왔다. 송아지, 농업 도구들 그리고 텐트 등도 함께 배에 싣고 왔다. 양코프스키 가족은 행복한 미래를 기대하며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커다란 재앙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겍이 미하일을 데리러 간 사이에 북만주 일대에서 마적으로 악명 높은 홍호자가 시데미반도에 출현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홍호자들은 겍의 집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겍의 부인은 잔인하게 매를 맞고 강간을 당해 죽은 채 줄에 매달려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이었다. 농장의 일꾼들도 모두 살해당해 지하실에 버려져 있었다. 우리를 빠져 나온 소들은 산기슭으로 올라가 울부짖고 있었으며, 겍의 7살짜리 아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홍호자에게 약탈을 당한 것은 겍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이곳에 새로이 정착하기 시작한 한국인들이었다. 당시 시데미 지역은 러시아의 공권력이 아직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이자 미개발지이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한인들은 홍호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겍과 미하일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데미 부근 20킬로 반경에 살고 있던 한인들이 작은 노새를 타고 겍의 집에 도착해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히 미하일과 겍에게 설명해 주었다. 한인들은 겍이 집을 비운 사이에 마적들이 한인 거주지는 물론 겍의 농장을 약탈하고 도망갔다고 말해주었다. 대다수가 중국인들로 구성된 마적들은 시데미 인근 지역을 자신의 관할구역으로 생각하고 한국인과 러시아인의 이주에 대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며 원하는 대로 약탈해 간 것이다. 또한 마적들은 한국인들을 인질로 잡아 가기도 했다. 이곳에 정착한 한인들 중에는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사냥꾼들도 있었다. 미하일과 겍은 이들 한인들과 함께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홍호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미하일의 주도로 일종의 “국제부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시베리아 타이가 삼림으로 도망간 마적들을 추적했다. 한편 용감한 올가는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칼빈총으로 무장하고 바다 위에 정박한 스쿠너에 그대로 남아 있기로 했다. 미하일과 겍은 만주 국경선을 따라 이들을 추적해 일부를 생포하기도 하고 총격전을 통해 일부를 사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납치된 한국인 인질들은 무사히 구출해 냈다. 그러나 겍의 어린 아들의 생사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극도의 실망에 빠진 겍은 이후에도 중국 국경을 수십 차례나 다니며 마적을 추적하고 아들의 거처를 수소문했지만 찾지는 못했다. 나아가 이 사건을 계기로 양코프스키 가족들은 중국인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증오심을 그러나 한국인들에 대해 마음 속 깊은 신뢰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마적들은 시데미반도 주변에 수시로 출몰했다. 이곳에 정착한 러시아인들은 물론 한인들에게도 홍호자들은 타이가의 호랑이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다. 특히 당시는 한반도 북부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는 한인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러시아의 공권력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토착세력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한인들은 미하일 양코프스키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의 보호 하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일종의 자경단을 조직해 마적단의 약탈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심지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880년 3월 어느 날 마적단을 추적하는 도중 미하일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마적단의 두목이 미하일을 죽이려고 몰래 나무 뒤에 매복해 있었다. 미하일은 주변에 무엇인가 있다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낌새를 눈치 챈 미하일은 다행히도 마적단 두목이 총을 쏘기 전에 먼저 방아쇠를 당겨 두목을 죽일 수 있었다. 이 마적 두목과의 대결은 연해주에 이주해 살고 있던 한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어떻게 미하일이 그를 죽이려고 몰래 숨어있던 마적을 볼 수 있었을까? 한인들은 미하일이 앞에는 물론 뒤에도 눈이 있어 사람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신기에 가까운 사격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네눈이]의 전설이 탄생한 것이다. 네눈이 미하일 양코프스키의 신기에 가까운 사격술은 곧 바람과 같이 퍼져 연해주의 한인촌은 물론 한반도의 유명한 사냥꾼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베리아의 호랑이 사냥꾼 네눈이라는 이름은 미하일은 물론 그의 아들 그리고 손자에 이르기까지 양코프스키의 가족들을 칭하는 별칭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미하일의 아들 유리를 네눈이 아들로 그리고 유리의 세 아들을 네눈이 손자로 불렀다.
시데미반도에 정착한 미하일에게 무엇보다 급선무는 가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집과 가축들을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농장을 신축하는 것이었다. 미하일을 비롯한 가족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특히 올가는 양코프스키 가족이 시데미반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다. 항상 허리띠에 열쇄 꾸러미를 매달고 다니는 올가는 근면한 여성의 표상이었다. 올가는 양코프스키농장의 하인들을 관리하며 곡간을 책임지고 있었다. 또한 자녀들의 교육 등 안살림도 도맡아 했다. 그럼에도 올가는 단 한마디의 싫은 소리도 하지 않고 현명하게 가족을 이끌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1880년 정착한지 일 년도 안되어 가족은 견고한 벽돌로 총알도 관통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벽을 쌓아 요새와 같은 주택을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집을 짓는 과정에서 필요한 흙이나 석회들을 바닷가 주변에서 얻어야만 했다. 1880년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시데미만에서 석회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을 찾다가 해안가 인근에 드문드문 튀어나온 조그마한 둔덕들을 발견하고 이들을 파기 시작했다. 해안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그리고 해수면에서 약 30미터 정도 경사진 이 둔덕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조개무덤들이었다. 이 조개무덤에서 발견된 조개들은 석회로 사용하기에는 질이 낮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대신 양코프스키는 이 조개무덤들을 통해 시데미지역에서 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하고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주변지역을 탐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조개무덤에서 석기파편, 토기파편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뼈들을 발견했다. 1887년 여름에는 마르가리토프, 셰벨레프, 줄리 브린너 등 연해주에 살고 있는 유력인사들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르가리토프가 작성한 당시의 발굴 보고서는 한국에서 발행되는 대표적인 학술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 1892년 1월호에 영문으로 번역되어 게재되기도 했다. 이를 발굴한 일련의 러시아 학자들은 미하일의 이름을 따서 이를 양코프스키패총으로 이름지었고 양코프스키패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선사시대 이지역의 문화를 양코프스키문화라 명명했다. 동시에 미하일은 인근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데미반도는 그의 이름을 따라 양코프스키반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반도와 가까운 본토에 있는 449미터 높이의 인근 지역의 산도 양코프스키산으로 명명되었다.
미하일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종마장을 만들어 말과 소들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말을 사육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타이가를 배회하는 호랑이들이었다. 시데미반도에 정착한 직후인 1880년 겨울 동안 이 지역에 호랑이가 출몰해 4마리의 종마와 어린 새끼 망아지들을 죽였지만 미하일의 종마장은 이러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말들의 왜소한 체격이었다. 당시 시베리아 지역에는 열악한 기후조건 때문에 양질의 말들이 살기가 어려웠고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몽고종이나 만주종, 한국 재래종 등은 체격이 작았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미하일은 매년 교배를 통해 키가 크고 주변 기후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말들의 품종을 개량했다. 특히 육지와 쉽게 차단될 수 있는 양코프스키반도의 지형적 특징 때문에 미하일은 육지로 통하는 입구를 막아 말들을 우리 밖에서 안전하게 방목할 수 있었다. 방목의 결과로 미하일의 말들은 주변의 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이 빨랐고 시베리아의 차가운 기후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이 말들은 마치 최상의 마부가 돌보는 것 같이 “비에 씻기거나 혹은 바람에 말려지면서” 품종이 개량되었다.
미하일은 말은 물론 소, 양, 돼지 등 여러 종류의 가축도 사육했다. 특히 당시 연해주 지역에는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는데 미하일은 이들이 약용으로 사용하는 녹용을 채취하기 위해 사슴을 사육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했다. 1883년 이 농장을 방문한 양코프스키 가족의 친구 드보프스키는 농장의 변한 모습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드보프스키는 그의 책 Siberian Reminiscence에서 극동지역 어느 곳에서도 미하일의 농장보다 나은 농장을 결코 본적이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농장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 1880년 양코프스키 농장 설립 직후 처음 수년 동안 농장의 살림은 주로 가족들이 돌보았다. 처음에 미하일을 도운 유일한 조력자는 부인 올가, 처남 사이몬, 두 명의 퇴역한 군인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 농민들뿐이었다. 미하일은 농장의 일꾼으로 중국인들보다는 한인들을 선호했고, 한인들은 미하일의 농장이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하일이 한국인들을 선호한 이유는 중국인들이 대부분 마적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하일은 마치 자신의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에게 유린당한 것처럼 열강의 침략과 가난의 고통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해 온 한인들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있었다. 미하일은 농장 내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양코프스키농장에 고용된 한인들은 대부분 소와 말우리를 돌보는데 고용되었는데, 이들중 일부는 후에 독자적인 농장 소유주가 되기도 했다. 양코프스키농장은 시작한지 불과 수 년만에 대규모의 기업농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미하일의 성공적인 정착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 한 구석에는 항상 정치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그는 비록 자유민이 되었지만 동시베리아 군부의 감시 대상으로 항상 불안한 상황이었다.
양코프스키의 농장은 러시아 정부의 연해주 식민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했다. 1880년대 중반 아무르지역의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러시아 정부는 말의 사육이 연해주 지역의 성공적인 발전을 위해 필수 불가결 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1884년 5월 8일에는 군부에서 말을 구입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사항들이 제시되었다. 당시 말은 일반인은 물론 군대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다. 동시베리아 군부는 병력을 증강하면서 기마대와 포병대를 위한 군마를 해당 지역의 농장에서 구입하고 있었다. 미하일의 지속적인 말 품종 개량작업은 어느덧 동시베리아 총독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1890년 여름 연해주의 코르프(Baron N.A. Korf) 총독이 양코프스키농장을 방문했다. 코르프 총독은 농장을 시찰하고 말들을 검사한 후 양코프스키농장에서 사육된 말들의 품종에 만족을 표시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아랍이나 유럽종에 비해 말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군마로서의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양코프스키농장에서 군마를 구입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총독은 적어도 한 뼘 정도 키가 더 크고 날씬한 말들을 원했다. 동시에 코르프는 연해주 개발에 대한 미하일의 노력에 감사를 표시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그가 사면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역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미하일은 아직 사면이 안된 정치범으로 인식되었고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코르프의 제안에 따라 황제는 1890년 6월 5일 미하일에 대한 경찰 감시의 철회와 최종 사면을 내렸다.
한편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농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말을 군대에 공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인식했다. 그리고 코르프가 언급한데로 말의 키를 높이기 위해 품종개량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인 이르쿠츠크에는 국영목장이 있어 품질이 좋은 종마를 구할 수 있었다. 1891년 11월 미하일은 양코프스키농장에서 일하는 퇴역준위인 아파나시 안티포프와 함께 이르쿠츠크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났다. 여행의 목적은 코르프 총독에게 약속한대로 군마로 납품할 말의 키를 적어도 한 뼘 정도 키우기 위해 필요한 종마를 구입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미하일은 커다란 모험을 하고 있었다. 미하일의 이르쿠츠크 여행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성공의 보장도 없었다. 미하일은 어린 말들을 팔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경제적 어려움 이외에도 시베리아의 추운 날씨와 매섭게 내리는 눈발을 헤치며 여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해야만 하는 모험이었다. 무엇보다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5천5백 킬로미터의 먼 거리며 길도 아주 험난했다. 또한 타이가의 늑대와 호랑이 그리고 마적단들이 도처에서 출몰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더라고 품질이 좋은 말들을 구입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다행히 미하일은 정치범으로 보낸 죄수 시절에 걸어서 이 지역으로 유배 왔기 때문에 지리적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미하일 일행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1892년 새해가 되서야 이르쿠츠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6마리의 충만하고 혈기 왕성한 어린 수말과 36마리의 암말을 구입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영농장에서 사육되는 톰스크 품종이며 또한 일부는 쿠즈네스크 지역의 개인 종마장에서 구입한 개량된 품종이었다. 미하일 양코프스키는 이르쿠츠크에서 말들을 구입한후 고향 시데미를 향해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지금까지 온 길보다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고 위험했다. 무엇보다도 얼음이 녹는 봄철에 바이칼 호수를 횡단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꽁꽁 언 바이칼호수의 얼음들이 녹기 시작하면서 물구멍이 이곳저곳에서 드러났다. 미하일 일행이 셀렝가강에 도달할 무렵 강의 얼음이 깨지면서 일행은 물속으로 빠질 뻔한 적도 있었다. 강을 건넌 후에도 일행은 시바코보의 코자크 마을에서 잉고다, 아르곤 그리고 아무르강을 따라 뗏목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물살은 일행을 집어 삼킬 정도로 거칠었다. 오랜 시간을 강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건초를 구입하지 못해 말들이 거의 아사 직전에 이를 정도였다.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미하일은 섬에서 구한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먹이로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세 마리의 암말들이 병들고 결국에는 아무르강의 물속으로 빠져 죽기도 했다. 다행히 미하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우수리강 하구까지 증기선을 타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숭가차 강변과 한카호수 주위를 따라 말들을 몰고 수많은 늪지를 헤치며 걸어갔다. 이 여정에서 말발굽이 곰팡이에 감염되어 썩어서 절뚝거리기도 했다. 미하일은 말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니콜스크에서 거의 한달 동안 체류해야만 했다. 1892년 9월 약 10개월의 험난한 모험과 여정을 통해 6말의 종마와 33마리의 커다란 톰스크 암말들이 시데미 반도에 도착했다. 미하일은 이제 말들의 교배를 통해 키를 높이고 코르프 총독에게 한 약속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895년 2월 17일 미하일의 종마장은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주 기업가 명단에 등재될 수 있었다. 이것은 말의 혈통을 유지하고 나아가 개량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규칙들을 농장주가 준수하고 군부대에 의무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까지 양코프스키 농장은 8마리의 종마, 126 마리의 승마용 말을 사육하고 있었다. 특히 미하일은 연해주에 주둔하고 한 연대병력에 군마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기도 했다.양코프스키반도에 있는 미하일의 농장은 계속 번창했다.
미하일은 주변의 한인이나 중국인들과 접촉하면서 이들로부터 인삼이 귀중한 약재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94년 에는 그의 아들 유리와 함께 한반도 북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미하일은 한인들을 통해 인삼의 재배방법을 배우고 러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양코프스키반도 내 ‘프로세카’라고 불리는 언덕의 한 계곡에 인삼을 재배해 많은 수익을 벌었다. 또한 그는 양코프스키농장에 우수리 꽃사슴을 방목해 해마다 가을이 되면 엄청난 양의 녹용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연해주에는 우수리 지역의 꽃사슴들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미하일은 꽃사슴들을 주변의 사나운 호랑이나 표범으로부터 보호하고 나아가 사료도 제공했다. 방황하는 새끼 사슴들을 사로잡아 소의 젖을 먹이며 가축으로 사육했다. 때때로 사슴들은 양코프스키반도를 떠나 해협을 건너 타이가의 울창한 삼림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밀렵꾼이나 사나운 야생짐승을 피해 다시 양코프스키반도로 되돌아오곤 했다. 미하일은 양코프스키반도 안에서 사슴들을 방목해 키울 수 있도록 지협을 횡단하는 펜스를 설치했다. 그 결과 양코프스키농장의 사슴은 700마리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일명 판두이라고 불리는 부드러운 우수리 꽃사슴의 뿔은 양코프스키 가족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었다. 양코프스키농장이 점점 확대되면서 타이가를 배회하는 무서운 호랑이나 표범, 늑대와 같은 야생짐승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 특히 타이가에 출몰하는 호랑이는 가축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미하일이 농장을 만든지 처음 15년 동안 말 50필 이상 그리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개와 돼지 그리고 소들이 호랑이에 의해 살육 당했다. 미하일은 자신의 말과 사슴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호랑이를 죽여야만 했다. 뛰어난 사격술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네눈이로 알려진 미하일은 점차 시베리아에서 호랑이 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일생을 통해 모두 9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미하일은 세계 100대 유명 사냥꾼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미하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들도 호랑이 사냥으로 연해주와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어느날 미하일이 업무로 농장을 비우는 동안에 암컷 호랑이가 말을 물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곧 목장에 고용된 목동들이 호랑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미하일의 조수이자 은퇴한 포병하사관인 플라톤 포도로프라고 불리는 몸집이 큰 거인이 이 암컷 호랑이에게 공격을 당했다. 플라톤은 호랑이에 심하게 할퀴고 깊은 상처를 입었다. 호랑이가 표도로프를 안장에서 잡아끌어 내리고 물려고 하는 찰라 다행히도 인근에 있던 미하일의 두 아들 알랙산더와 유리가 이 호랑이를 쏴 죽여 표도로프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미하일은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젊은 시절부터 흥미있게 관찰해 온 연해주 지역의 자연환경에 대해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는 아무르지역 탐사 협회지에 “아스콜드 섬”, “호랑이, 표범, 그리고 사슴”, “남우수리 지역에서의 말사육” “아무르만 해안의 고대 패총 발견” 등을 발표했다. 특히 미하일은 원주민들의 생활에도 깊은 관심이 있어 이들의 역사와 발해사에 대한 글도 남겼다. 미하일은 뛰어난 동식물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극동지역에서 자생하는 희귀한 동식물들을 채집해 표본을 만들어 유럽의 여러 박물관과 수집가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7종류의 나비들이 양코프스키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특히 미하일은 중국, 한국, 그리고 러시아 삼국이 만나는 작은 국경지역인 포시에트 부근의 작은 지역에 분포해 살고 있는 ‘앙코프스키 사초’와 ‘양코프스키 멧새’ 무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한편 농장을 운영하면서 거부를 이룬 미하일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희사하기도 했다. 새로이 조직된 아무르지역 탐사협회가 협회의 건물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의 유력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미하일은 적지 않은 금액을 기증했다. 아직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 있는 아무르지역 탐사협회 명예의 전당에는 협회를 설립할 당시의 발기인 13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중에는 시베리아 타이가에서 호랑이 사냥꾼으로 유명한 아르세니에프, 고고학자 마르가르토프 등과 함께 미하일 양코프스키의 이름도 남아 있다. 나아가 미하일은 블라디보스토크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많은 기념메달을 수여 받았다. 이 중에는 특히 모스크바 영예로운 농업협회의 메달, 그리고 종마 사육의 공로로 메달을 수여 받았다. 또한 두 개의 군사메달이 그에게 부여되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의 참전한 공로로 그리고 중국 캠페인에 참전한 대가로 메달이 수여되기도 했다.
미하일은 홍호자들을 추적해 만주 벌판을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심한 폐렴에 걸려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의사들은 미하일에게 건조한 내륙에서 지역에 가서 요양하라고 권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하일은 젊은 여인을 사귀게 되었고 급기야는 장남인 유리와 그의 부인 올가를 시데미에 남겨 놓고 카자흐크탄의 세미팔라틴스크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의 인생 마지막 시기에 시데미반도를 단지 날씨가 온화한 가을철에만 방문하곤 했다. 1912년 미하일은 크림반도의 소치에서 사망해 유언에 따라 그곳에 매장되었다. 1912년 미하일이 죽은 후 양코프스키농장은 장남 유리 가족이 돌보며 번성했다. 그러나 1922년 볼셰비키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면서 ‘네눈이의 아들’ 유리 양코프스키와 그의 가족 일행은 다른 백계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를 피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볼셰비키를 피해 한반도로 피난한 난민들 대부분은 곧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미하일의 자손들은 대부분 한반도에 남아 식민지시대 러시아인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 별도의 지면을 빌려 전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