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7일 일요일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의 러시아난민들의 일상


일제의 한반도 강점 기간 중에 일어난 한국과 러시아 관계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다. 한국과 러시아 관계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도 한러관계에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이 시기를 공백상태로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근대 한국의 대외관계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러시아인들이 일시에 한반도를 찾은 중요한 사건이 바로 이 시기에 발생했다. 1920년대 초 한반도는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볼셰비키를 피해 피난 온 러시아난민들의 피난처이었다. 비록 이들 중 상당수는 상하이, 하얼빈, 샌프란시스코 등지로 다시 떠났지만 일부는 그대로 한반도에 남아 식민지시대 러시아인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글을 식민지 시대 한반도에서의 러시아난민들의 일상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1922년 10월 25일은 시베리아에 파병된 일본군이 연해주에서 철군하는 마지막 예정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고 볼셰비키의 입성이 다가오면서 연해주지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연해주지역에서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백계러시아인들의 전투는 1922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내란에서 백계러시아군의 주된 병력은 미하일 디테리흐스(Mikhail Diterikhs) 중장이 이끄는 극동군이었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의 함락 직전 극동군은 4개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볼가군은 극동군 제3단으로 조직되었고, 시베리아군은 제2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시베리안 코자크단은 과거 제1단의 남은 병력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극동군의 제1,2단 일부 병력으로 별도의 극동군이 조직되었다. 1922년 9월 1일까지 전체 극동군은 거의 괴멸당하고 8천 명 정도의 병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이들 가운데 수백 명이 1922년 10월 13일과 14일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 백군이 연해주에서 후퇴할 당시 대부분의 극동군은 만주지역으로 피신했고, 극동군의 제1, 2단만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하고 있었다. 한반도로 피신한 백계러시아 난민들은 대부분 극동군에 소속된 병사들과 이들의 가족들이었다.
백계러시아인들의 블라디보스토크 탈출은 1922년 10월 21일부터 시작되었다. 볼셰비키의 입성이 다가오면서 이들은 황급히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야만 했다.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들은 프랑스제 자동차를 60루블에 팔거나 혹은 보관하고 있던 귀금속을 가지고 피신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에 올라야만 했다. 10월 24일 글레보프F.L. Glebov중장이 이끄는 극동군 병사들이 가족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와 한반도 북부 사이에 위치한 포시에트Pos'et에 도착했다. 곧 이어 레베데프D.A. Lebedev 장군이 이끄는 우랄-헌치맨여단Ural-Huntsmen의 병사와 가족들도 포시에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극동군의 코자크 병사들도 도착해 주력부대에 가담했다. 10월 25일에는 스타크Yu. K. Stark 제독이 해군 병사들과 가족들이 승선한 시베리아함대를 이끌고 포시에트에 도착했다.
이와 같이 대규모 병력과 민간인들이 갑자기 블라디보스토크를 탈출하는 상황에서 극동군 사령관 미하일 디테리흐스 중장은 앞으로의 행로에 대해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스타크 제독은 독자적으로 원산 행을 결정했다. 스타크 제독은 러시아난민들의 피난처로서 한반도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가장 인접한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군벌들이 지역별로 득세해 러시아난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극동지역에 항구를 가지고 있는 영국 등 일부 서방세력은 모두 백계러시아인들을 수용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미국은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항구는 마닐라로 포시에트에서 2천마일 이상이나 떨어져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백계러시아 지도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타크 제독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항구는 바로 일본의 식민지로서 포시에트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원산뿐이었다.
1922년 10월 28일 러시아난민들은 시베리아 함대를 포함해 동원 가능한 모든 선박들을 타고 포시에트를 출발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들을 태울 선박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난민들은 비좁은 배안에 승선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춥고 음식은 물론 심지어 음료수도 부족해 난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높은 파도를 헤치며 원산으로 항해하는 도중 일부는 갑판에서 새우잠을 자야만 했고 심한 격랑 속에서 두 명의 어린이들이 죽기도 했다. 10월 31일 피난선들이 원산에 도착했다. 이후 수차에 걸쳐 난민을 태운 선박들이 계속해 원산에 도착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발행한 露國避難民救護誌에 의하면 1922년 11월 1일 현재 원산항에 도착한 러시아난민의 숫자는 총 7504명이었다. 이들은 부상병이 541명, 해군과 선박 승무원 1221명과 이들의 가족 342명(남 5명, 여 208명, 어린이 129명) 그리고 군인 2830명, 유년학교 생도 307명, 일반 피난민 2263명(남 668명, 여 793명, 어린이 802명)로 대부분은 시베리아 함대 사령관인 스타크 제독이 이끄는 함선을 타고 피난 온 사람들이었다. 1922년의 겨울 한반도로 피난 온 백계러시아인들은 약 9천명에 달했다.
러시아난민을 실은 배들이 원산 앞바다에 도착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우려했다. 무엇보다도 중무장한 군인들이 일반 피난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 한반도에 정치적 군사적 불안을 야기 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정부는 난민의 상륙을 허용하지 않고 즉시 다른 지역으로 떠나도록 촉구했다. 한편 배 위에서 상륙을 기다리고 있던 러시아난민들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음료수와 석탄과 같은 긴급한 구조용품이 필요했다. 하루하루가 급박한 상황에서 일본정부는 스타크 제독에게 선박들이 즉시 항구를 떠나는데 사용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물과 석탄을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일본정부는 백계러시아의 육군과 해군 병사 그리고 일반 난민에 대해 각기 다른 정책을 채택했다. 일본해역에서 백계러시아 전함의 출현은 볼셰비키정부와 일본정부간의 협상에 커다란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가능한 빨리 이들이 일본영해 밖으로 나가 줄 것을 원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지상병력에 대해서는 피난민으로 간주하고 만약 이들이 무장을 해제한다면 상륙을 허가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에 대항해 적의에 불타고 있는 이들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들은 곧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 볼셰비키와 일전 불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무엇보다도 무기를 그대로 소지한 채 가급적 러시아에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하기를 원했다. 일본정부는 이들을 한반도에서 해산시켜 만주를 통해 바이칼지역이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시키길 희망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러시아난민 문제에 대해 엄정 중립을 취하고 만주를 통해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난민들을 이끌고 있는 스타크 제독은 일본정부의 이러한 소극적 태도에 대응할 수 어떠한 있는 수단도 없었다. 더구나 곧 겨울이 다가와 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불가피하게 11월 21일 14척의 함선에 약 1970명(해군 약 1500명, 유년학교 생도 335명 및 그 가족 129명)을 분승해 원산을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23일 부산에 도착한 스타크 일행은 일부 선박을 보수한 후 러시아난민을 실은 다른 함선과 합류해 12월 2일 한반도를 떠났다.
스타크 제독 일행이 원산을 떠난 후 원산에 남아 있는 피난민의 수는 5572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지상군 병력들과 이들의 가족이었다. 이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부상자가 500여명이나 있어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다음해 봄까지 이들이 원산에서 체류하는 것을 허용했다. 따라서 부상자를 포함해 여성과 어린이 등 약 2500명에 대해서는 인도적 견지에서 육지 상륙을 허가하고 원산세관 안에 마련된 임시 창고(제1수용소)에 이들을 수용했다. 반면에 백계러시아 군인들에 대해서는 상륙을 허용하지 않고 잠시 함정 안에 체류하도록 조치했다. 이어 12월에 원산 세관항구 안에 간이 건물 5동을 설치하고 함경남도 문천군 명효면 영흥만에 위치한 국립감화원 영흥학교 소속 건물을 일부 차용해 제2수용소를 설치해 러시아난민들을 수용했다. 제2수용소를 원산에서 떨어진 장소에 설치한 이유는 선박 안은 물론 제1수용소 내에서 이질, 디프테리아,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고 심지어 소아 홍역까지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을 원산주민으로부터 격리시켜 위생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러시아난민들의 수용소 생활은 안락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의식주가 제공되었고 무엇보다도 안전이 보장되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난민들은 규칙적인 식사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종교의식을 통해 다소나마 정신적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난민들이 스스로 빵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이 수용소 안에 마련되었고, 방안에는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항상 사모바르가 제공되었다. 난민들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끼니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보통 식사 전에는 홍차가 그리고 주식으로는 자신들이 만든 검은 빵 그리고 부식으로 고기와 채소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콩기름과 동물성 기름 등을 사용해 만든 반찬도 제공되었다.
난민들은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러시아 정교회 종교의식을 통해 상호간의 강력한 유대관계와 몰락한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난민들은 크리스마스(1월 6일부터 10일)와 부활절(4월 8일) 행사를 철저히 준수했다. 특히 1923년 크리스마스에는 조선총독 부인이 크리스마스트리를 기증하고 애국부인회가 1393개의 위문품 등을 이들에게 기증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파티를 열고 춤을 추며 연극을 공연하고 학생들은 악대를 조직해 행진하기도 했다. 부활절에는 엄숙하게 제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매달 적어도 1,2 차례의 종교적인 기념일이 있어 이런 날에는 만사를 제치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같이 기도하고 식사하며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원산에서의 피난 생활 약 9개월 동안 221명의 백계러시아인들이 사망했다. 연령별로는 5세 미만의 어린이가 160명으로 가장 많았고 주된 사망원인은 주로 폐렴이었다. 이들에 대한 장례식도 러시아 정교회 의식에 따라 성직자들에 의해 거행되었다.
피난민들이 안정을 찾으면서 가장 먼저 고민한 문제는 자녀들의 교육이었다. 일본에서도 이미 1920년 가을에 백계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요코하마에 노국중학교가 그리고 1930년대에는 동경에 푸시킨학교가 문을 열었다. 원산에서도 수용소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백계러시아인들의 자녀를 위한 임시학교가 문을 열었다. 영흥만에 있는 제2수용소에는 1922년 12월부터 그리고 원산의 세관항 안에 있는 제1수용소에는 1923년 1월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임시학교의 교실이 비좁았기 때문에 조선불교연합회 원산지부가 중심이 되어 공사비 2천2백 원을 지원해 42평 규모의 예배당을 신축해 학교로 사용하기도 했다. 약 1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923년 2월 18일에 건물이 완성되어 2월 27일 개교식이 거행되었고 같은 날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200여명의 학생으로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제2수용소에 있는 학교가 이전해서 합병한 이후에는 전체 학생수가 336명으로 증가했다. 학생들의 학용품은 주로 기부금으로 구입하거나 경성기독교연합회에서 제공하는 기증품으로 충당했다.
수업은 크게 초등과와 중등과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초등과는 8세에서 10세 어린이들을 1-3학급으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전체 240명의 학생들이 초등과에 재학했다. 초등과 수업은 오전 8시부터 오전 11시 그리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등 2부제 하루 3시간씩 진행되었다. 수업과목은 종교, 러시아어, 역사, 산수, 박물학, 지리, 영어, 일본어, 대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중등과는 11세에서 16세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4-6급으로 분류해 구성되었고 전체 학생 수는 96명이었다. 중등과 수업은 초등과 수업이 종료된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하루 4시간씩 이루어졌다. 교원은 초등과가 13명 중등과가 17명으로 구성되었다. 교원의 대부분은 러시아난민 중에서 선발했고, 단지 초등과의 영어과목과 일본어과목의 교사만 현지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선발했다. 또한 교실은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다. 기도는 매일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하루에 2차례 진행되었다. 러시아난민들을 위한 수용소가 1923년 7월말로 폐쇄되었기 때문에 이 임시학교 겸 예배당도 1923년 7월 25일 폐쇄되었다.
일본정부는 피난민들에 대해 약간의 급양금을 지급해 왔다. 그러나 급양금 지급이 1923년 3월말로 중단되자 피난민들은 스스로 자립해야만 했다. 전체 피난민 가운데 610명이 일자리를 신청했고 이중 43명이 직업을 찾았다. 이들이 얻은 주요 일자리 중에는 원산에 살고 있는 한 일본인의 햄 제조공장에 10명(남), 운산금광의 광부 감독 7명(남4, 여3) 경성의 러시아영사관 구제회에서 고용한 구두제조공 7명(남), 원산의 러시아영사관 사무원 6명(남4, 여2), 강원도 농장에서 고용된 3명(남) 등이었다. 이 가운데는 경성에서 일본인과 결혼한 러시아 여성도 있었다.
이외에도 2814명이 노동집단을 조직해 단체로 취업을 희망했다. 이중 1/3 가량이 농업분야에 진출을 원했다. 일본정부는 이들에 대해 장기적이며 영구적인 직종보다는 토목작업과 같이 임시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알선해 배정했다. 일본정부는 영흥만 제2수용소에서 문천역까지 약 6리에 걸친 도로를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보수하는 공사에 러시아난민 노동자 286명을 배정해서 약 1개월 만에 보수공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어 강원도 철원 지역의 평야를 벼농사가 적합하도록 만드는 철원중앙수리조합공사에 1700명의 러시아난민들이 투입되었다. 처음 도로공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러시아인들은 체격이 좋아 육체노동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철원의 공사실적은 저조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하루 12시간씩 열심히 일하고 비가와도 쉬지 않고 일하는 반면 러시아인들은 단지 하루에 6시간 정도 일하고 종교적 축제 등을 이유로 일을 하지 않아 노동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성진부터 단천까지 함경선 철도 주변의 노선보수 공사에 350명이 참여했다. 이 작업은 철원중앙수리조합공사에 비하면 비교적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원래 이런 육체노동은 군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미래도 전혀 보이지 않아 노역에 종사하는 것을 피했고 현장에서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원산 이외의 지역에서 중국인이나 조선인 노동자들에 비해 러시아인들은 노동생산성이 떨어져 직업을 얻기도 어려웠다.
일본정부는 러시아난민들에 대한 급양금 지원을 1923년 3월말로 중단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난민들의 만주지역 통과에 관한 중국과의 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고향으로 귀환을 희망하는 사람들에 한해 이후에도 6월말까지 약 3개월간 급여를 계속 제공했다. 이러한 가운데 난민들의 미래는 더욱 암울해져 갔다. 1923년 6월 21일 레베데프 소장이 이끄는 700여명의 우랄연대 병력이 엘도라도Eldorado호를 타고 상하이로 떠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피난민들은 크게 동요했다. 철원과 단천에 파견되어 일하던 피난민들 가운데 일부가 도주하기도 했다. 이에 난민 대표자들은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피난민의 이송을 완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7월 중순부터 퇴거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7월이 지나도 난민들의 만주통과에 대한 중국 측의 동의를 확보하지 못한 일본정부는 불가피하게 7월 31일 전체 피난민들에 대한 지원금을 중단하고 원산을 떠나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정부는 본국으로의 귀환을 원하는 난민들을 일부러 장춘에서 도중하차시키거나 만철과 만주 동부지역 부근에서 도망가도록 그대로 방치했다. 8월 7일 글레보프 중장은 대략 1030명의 난민들을 오호츠크Ohotsk호 등 3척에 싣고 부산과 상하이를 향해 출발했다. 이것으로 원산 난민의 철수는 완료되었다.
스타크 제독, 레베데프 소장, 글레보프 중장은 선단을 구성해 백계러시아 난민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떠났다. 러시아인들은 약 9개월이라는 한정된 기간이었지만 원산지역에 임시로 설치된 수용소에 거주하면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어린 자녀들을 위해 학교 겸 교회가 신축되었고, 원산을 중심으로 조그마한 러시아 사회가 구성되었다. 이들이 떠난 다음 한반도에 남은 러시아인들은 평양, 함흥, 경성 등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각자 힘든 망명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조사에 따르면 1926년 9월 1일 현재 한반도에 거주하는 백계러시아인 수는 128명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극동군과 우랄연대에 소속된 병사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식민지시대 한반도 외딴 시골까지 춤과 노래 등 러시아 문화의 영향이 폭 넓게 파급되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동시대 신문, 소설, 잡지, 시 등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10년 2월 21일 KBS TV를 통해 식민지시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희귀한 단편 무성영화가 전국으로 방영되었다. 116분 분량의 이 무성영화는 1925년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대수도원장인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신부가 한국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직접 촬영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원산의 한 학교 교정에서 열린 운동회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특히 한 소년이 러시아 코자크의 춤을 추는 모습이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식민지시대 한반도에 거주한 러시아인들은 한국인들의 북방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백석의 시 그리고 이효석의 소설에는 백계러시아인들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다.
식민지시대 한반도에 거주한 백계러시아인들은 모두 철저한 왕정주의자들이었다. 이들과 볼셰비키와의 관계는 마치 물과 기름 같았다. 1925년 일본이 소비에트정권과 외교를 정상화하고 정동 소련영사관에 볼셰비키 외교관들이 주재하기 시작했지만, 한반도에 거주하는 백계러시아인들은 이들과 관계를 철저히 단절하고 지냈다. 한반도에서 백계러시아인들의 역사는 1945년 해방이 되어 한반도 북부에 소련이 후원하는 김일성 공산정권이 들어오면서 다시 시련을 맞이했고, 우리들의 기억 속에 철저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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